적응도 지표의 유전성
개체들 사이에 적응도 상의 변이가 없다면 적응도 지표는 무의미하다. 만약 적응도가 곧 자식에게 전달될 좋은 유전자들을 가졌음을 뜻한다면, 진화가 어떻게 적응도에 변이가 생길 여지를 남겨두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선택은 적응도를 극대화하고 끝없이 밀어 올리게 되어 있다. 종 내에서 적응도의 변이가 존재함으로써 짝 고르기에서 인센티브를 제공할 여지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된’이라는 말과 ‘유전성이 있는’이라는 말의 차이를 알아야한다. 유전자에 바탕을 둔 모든 형질은 유전된다. 하지만 유전성이란 용어는 그보다 훨씬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개체들 사이의 형질 차이를 초래하는 원인들 가운데서 유전자의 차이가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유전성이라는 개념은 개체들 사이에 변이가 존재하는 형질에만 적용된다. 만일 어떤 형질이 모든 개체에게서 똑같은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 형질은 유전되지만 유전성은 없다. 적응도가 유전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적응도는 분명히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종에서 적응도의 변이가 나타나며, 그 변이를 일으키는 요인이 대개 유전자의 차이라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성선택은 왜 이러한 개인차가 지속될 여지를 남겨두었을까? …
생물학자들은 적응도의 변이를 유지시키는 진화의 힘을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두 가지 후보가 나타났다. 첫 번째 후보는 적응도의 대 환경 상대성을 강조하고, 두 번째 후보는 적응도를 좀먹는 해로운 돌연변이가 도처에 널려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The mating mind
환경 상대성:
나는 앞에서 적응도는 특정한 환경에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see also Adaptability depends on the context —AK). 다시 말해서, 개체군의 환경이 시간이나 장소에 따라 변하면 적합함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만약 적합함의 의미가 자꾸만 달라지고, 그래서 개체군이 모든 환경에서 통하는 단 하나의 유전자 집합에 안주할 수 없다면, 환경적 변이가 유전적 변이를 유지시킬 수 있다.
진화의 시계에서 물리적 환경은 언제나 변화 중이다. … 하지만 그러한 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적응도의 변이를 유지시키기에는 너무 더디고 드물다. … 물리적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환경, 즉 근처에서 진화하는 다른 종들의 존재다. 포식자는 더 빠르고 영리해지며, 늘 신종 기생생물이 진화한다. 바이러스는 놀라운 속도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 인간의 한 세대는 약 25년인 데 반해 박테리아의 한 세대는 고작 20분에 불과하다. 숙주가 기생생물에 저항성을 갖도록 한 세대 진화했을 때, 기생생물은 숙주를 이용하기 위해 이미 수많은 세대 진화한 상태다. … 기생생물에게 있어서 무엇이 적합한 성질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숙주의 몸이다. 그런데 그 반대도 성립한다. 숙주의 입장에서도 기생생물은 중요한 생물학적 환경이다. 기생생물의 능력이 숙주에게 있어서 무엇이 적합한 성질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 오늘의 기생생물에 저항성이 높은 유전자가 내일의 기생생물에게도 높은 저항성을 발휘한다는 보장이 없다. …
짝 고르기가 좋아하는 적응도 지표는 바이러스, 박테리아, 회충,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기생생물 등 온갖 기생생물에 대한 개체의 저항성을 잘 드러내는 형질일 것이다. …
환경은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에 따라서도 변한다. 우리 조상들은 아프리카 전역에 흩어져 작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아프리카 대륙은 하나의 대평원이아니다. 지역에 따라 날씨, 지질, 식물, 경쟁자, 포식자, 기생생물들이 조금씩 다르다. … 세대가 바뀔 때마다 조상들의 일부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면, 모든 조상들이 지역과 개인차를 초월하여 최고의 적응도를 갖도록 진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간의 변화는 시간에 따른 선택압의 변화와 더불어 적응도의 유전성이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시간과 공간에 따른 환경의 변동은 신체 적응도와 건강에서 아직까지 유전성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마음의 적응도지표(see Brain as a fitness indicator)라면 좀 문제가 있다. 기생생물이 진화의 압력을 행사하는 곳은 두뇌가 아니라 면역체계와 몸이기 때문이다. …
돌연변이:
1980년대 이후 많은 생물학자들은 적응도의 유전성이 유지되는 까닭은 항상 새로운 돌연변이가 출현하여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개체가 돌연변이를 많이 지니면 지닐수록 적응도는 떨어진다. 돌연변이 포화에 의한 멸종을 면하려면 돌연변이가 생기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돌연변이를 제거할 만큼 선택이 권능을 발휘해야 한다. … 시기와 종을 막론하고 자연선택과 성선택의 주요 임무는 새로 생긴 해로운 돌연변이를 제거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 선택이 새로운 돌연변이를 좋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돌연변이 유전자가 기존 유전자보다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에 더 유리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물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이러한 드문 경우이다. 이때가 바로 진화 - 종의 유전적 변화 - 가 일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나머지 시간에는 선택과 돌연변이 사이에 항상 팽팽한 긴장이 존재한다. …
단 몇 개의 유전자로 결정되는 단순한 형질의 경우, 선택은 돌연변이 퇴치에 아주 능하다. 돌연변이는 아주 극적인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연선택은 돌연변이를 신속하게 제거한다. 하지만 인간의 뇌와 같이 수많은 유전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아주 복잡한 형질의 경우에는 선택으로 모든 돌연변이를 퇴치하기가 어렵다. … 뇌의 경우에는 짝고르기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DNA 샘플의 창이 넓기 때문에 돌연변이 적재량과 적응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을 생물학자들은 형질의 돌연변이 표적 크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p179-189, The mating mind